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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에세이

풍경 - 시인과 촌장

by 조원석 2024. 7. 28.

<풍경> 하덕규가 작사, 작곡했고 시인과 촌장이 1986년에 발표한 노래다. 그해 여름, 디자인이 산뜻한 LP 들고 다니며 설레던 친구 한규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규는 지미 페이지에게 편지를 보내던 헤비메탈 키드였다. 

노래 멋있지, 프로그레시브하지 않냐?” 한규가 내게 물었다.

신선하네.” 내가 대답했다.

<고양이>라는 노래였다. 당시에는 한규도 나도 전축이 없어서 박유네 집에서 들었다. 후부터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하덕규의 노래를 선택해 들은 기억이 없다. 약간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어 피하고 싶었다. 

내가 평강(平康) 살던 2008, 손무일이 백일출가를 마치고 회향(廻向)했다. 손무일은 무소유 공동체를 꿈꾸며 평강에 닭을 키우던 활기차게 생긴 청년이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튀어나온 같은 젊은이들이 정자연리에 있는 대안학교에 모여 환영식을 열어 주었다. 현재가 너무 힘들고 아름다워 자체로 문학적인 젊은 눈빛들이 촛불보다 밝게 빛나던 자리였다. 교실 밖에서 젊은 남자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풍경> 듣고 자리로 들어간 나는 손무일의 회향을 축하한다며 <풍경> 낭송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돌아오는 풍경

회향(廻向)이네.” 제일 나이가 많지만 가장 젊은이를 사랑하는 서은주가 말했다.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제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회향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다

백남준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15세기 이전 서양의 시인은 모두 음유시인이었다고 말했다. 가수가 시인이었고 노래가 시였다고 한다. 서양의 경우 18세기쯤 돼서야 시란 쓰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수천년 동안 시인과 가수의 분별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문학은 음악을 언어화할 없지만 음악을 느끼는 사람의 내면을 언어화할 있다. 그렇다면 노래는 사람의 내면을 음악화하는 문학이 아닌가. 생각에 <풍경> 읽는 시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덕규는 시와 노래가 분리된 시대에 시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다. 내가 느낀 약간의 오글거림은 보는 시가 듣는 노래로 바뀌는 변곡점에서 발생한다. 듣는 시란 어떤 시인가를 생각해 본다.

평생을 내가 세상에 있을 곳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어.” 일우 형이 내게 말했다.

어쩌면 형은 회향하러 태어난 사람일지도 몰라. 스스로가 좋은 악기인데 연주하는 방법을 잘못 배워 고생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말이야.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다가 사람들만큼 고생해 버리는 바람에 난처해진 경우가 형의 번째 회향 스토리 아니냐 이거지. 내가 되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고 이십 년 동안 나를 고문하고 있잖아? 내가 봤을 때 형은 지금 두 번째 회향 중이야.” 내가 일우 형에게 말했다.

앨범 제목은 <푸른 >이다. 좋은 노래가 많다. 다만 건전가요 몫으로 부른 <고향의 > 옥에 티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성의없이 취급해 섭섭하다. 들국화가 1985 발표한 앨범 <들국화>에서 건전가요라며 부른 <우리의 소원> 진취적이고 간절한 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