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이슬>은 양희은이지.” 내가 말했다.
“나는 김민기 <아침 이슬>이 좋아. 가사의 의미와 화자의 의지가 일치하니까.” 내 친구 JH가 말했다.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 이슬>은 저녁 노을 같잖아?” 내가 말했다.
“나는 김민기가 과장이 없어서 좋아.” 일우 형이 말했다.
“스무 살 양희은의 절박한 음색은 다시 듣기 어려운, 시대의 목소리야. 설움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서럽게 소리내는 여자는 다시 없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JH가 부르기에는 김민기가 좋을 거야.” 내 친구 MH가 말했다.
음악 취향은 다를수록 유익하다. 고유한 취향 자체가 가치라서 그렇다. 은하수 밤뱃놀이 같은 주제다.
김민기는 어떤 사람인가?
“공연장 무대 뒤로 찾아갔더니 직감적으로 절 알아보더군요. 대뜸 얼굴을 쳐다보면서 ‘너 아버지 없지?’ 하고 묻는 거예요.” 양희은이 1970년에 김민기를 처음 만난 장면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김민기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1993년에 라디오 디제이 이종환이 김민기를 인터뷰했다.
“잘한다, 경기고등학교 나오고 서울대학 나온 사람이 공장에 가서 가죽옷을 만들었단 말이죠?” 이종환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나 소중한 일들인데요.” 김민기가 펄쩍뛰며 대답했다.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인 줄만 알았던 김민기가 단호하게 반박하니 이종환이 당황했다.
나는 김민기 노래에서 세 가지 문학적 주제와 한 가지 음악적 형식을 발견했다. <아침 이슬>의 화자는 서럽고, <식구 생각>의 화자는 서운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의 화자는 현실적이다. 김민기는 한국어에 내재된 운율을 꺼내 선율을 입혔다. 운율이 선율을 타고 아름답게 사라지며 의미를 남기는 형식이다. 당시 노래들에 여전하던 왜색이 전혀 없다.
늘 정에 굶주려 살던 MH가 기타를 치며 <식구 생각>을 부르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하하’라는 의태어 같은 감탄사 배치가 절묘하다. MH는 이 구절을 특히 잘 불렀다. 그는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김민기는 어린이를 위한 공연에 많은 정성을 들였어. 호흡이 긴 사람이야.” JH가 내게 말했다.
“김민기는 지금 당장 여기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듣고 싶었을 거야.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내는 소리야말로 순간의 행복이자 영원한 복음(福音) 아니겠냐?” 내가 말했다.
김민기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죽을 때까지 돈 안 되는 일만 하겠다던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는 수익모델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수익모델 자체가 없는 일이 훨씬 많다고 주장하며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그냥 한 사람이다. 김민기는 걸어다니는 동학(東學)이라고 불리던 무위당 장일순을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나는 김민기의 삶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돈도 벌면서 좋은 일도 할 수 있을까라는 내 고민 자체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24년 7월 21일, 김민기가 별세했다. 한여름 밤배를 타고 떠났다. 김민기가 부르는 <작은 연못>을 들었다. 양희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민기 노래를 들으면 연못이 보인다. 양희은 노래를 들으면 연못 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나는 김민기가 부르는 김민기 노래가 좋다.
'음악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en Doves Cry - Prince - 1984 (6) | 2024.09.27 |
---|---|
Jump - Van Halen - 1984 (2) | 2024.09.20 |
희망가 - 남궁옥분 (6) | 2024.08.24 |
Turn! Turn! Turn! (To Everything There Is A Season) - The Byrds (2) | 2024.08.20 |
풍경 - 시인과 촌장 (5) | 2024.07.28 |